12-09 생의 마지막 길 편하게下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 아름답고 품위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회사원 송래형(61)씨. 그는 수첩 속에 장기기증 서약서와 화장 유언서 등을 넣고 다닌다. 장기기증 서약서에는 ‘안구는 가장 나이 어린 시각장애인에게, 재물은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께 드리세요’라고 적혀 있다.
'관촌수필'을 쓴 소설가 이문구씨는 지난해 2월 말 고향 충남 보령의 관촌 소나무 숲에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당시 62세였다. 위암을 앓던 그는 숨지기 보름 전 의료진한테서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치료해줘 고맙다. 마무리할 게 있다''며 의료진의 허락을 받아 이틀간 집으로 갔다. 그동안 집필하던 동시집과 산문집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계약금 조로 인세 100만원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아빠가 혼수 상태에 빠지면 이틀 뒤 인공호흡기를 떼야 한다. 절대 내 이름을 붙여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 다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 말에 현혹돼 묘지를 만들지도 말라.'' 그는 아들 산복(28)씨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씨가 자신의 일기에서 '생사는 어차피 재천(在天)이여-'라고 노래했듯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 품위 있는 죽음=경남 산청군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의 설립자 양영모 이사장. 그는 2001년 7월 콧속에 암세포가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양 이사장은 ''병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라며 수술을 거부하고 요양을 택했다. 병세가 나빠진 지난해 2월, 가족 10여명이 모였다. 칠순 축하 자리였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초등학생 시절 보따리 장사를 하던 일, 고려대 법대에 다니면서도 사법고시 준비를 하지 못한 일 등을 차례로 회고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틈틈이 ''자기 물건을 잘 관리해 근검 절약해라''''부조나 화환을 받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운명하기 한 달 전에는 가족회의를 열어 화장한 뒤 교정에 심어진 나무의 거름이 되는 '수목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부인과 3남1녀도 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 가족 숲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해 9월 4일,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가족들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시신은 장례식 없이 세 시간 만에 경북대 의대에 해부용으로 보내졌다. 그의 죽음은 본인이 원했던 대로 한 달 뒤에나 세상에 알려졌다.
◆ 나누고 간다=2001년 11월 담낭암으로 숨진 우정례(당시 47.여)씨는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 시설에서 진통제만 맞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우씨는 보험사에서 미리 받은 종신보험료 5000만원 중 500만원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 같은 병실의 20대 백혈병 환자의 두 살배기 아이에게 예쁜 옷을 선물했다. 조카 네 명에게 옷 한 벌씩을 사주고 용돈도 줬다. 핸드백은 후배에게, 목걸이는 동생에게 주는 등 아끼는 물건들을 나눠줬다. 동생 정옥(48)씨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언니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건설회사를 다니다 5년 전 퇴직한 김병호(61)씨도 최근 노후대책으로 마련한 시가 4800만원짜리 목동 주상복합상가 분양권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는 4년 전인 200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72세였던 윤 교수는 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출소자 일자리 알선과 기술교육 지원에 더 열의를 보였다. 출소자 자립시설 기금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올해 3월 은평구에 3층짜리 건물을 매입해 '마지막 소원'을 이룬 뒤 지난 10월 세상을 떴다.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연세대 의대에 기증됐고 유족들은 조의금 전액(2600만원)을 출소자 자립시설에 기부했다.
◆ 죽음을 알면 삶에 충실해져=지난 10월 14일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의 한 강의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은 밝아야 하고 준비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는 점은 알지만 그 사실만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요.''(김희준.유전공학 3년)
'죽음의 철학적 접근'과목을 듣는 학생들이 오진탁(45.철학)교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김군은 ''죽음을 공개 토론하다 보니 '죽음=끝'이라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낙태수술이나 말기 암 환자의 모습 등을 담은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고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에 대해 써보게 한다''며 ''이렇게 죽음을 터놓고 얘기하면서 학생들이 삶에 더 충실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간호학과 김수지 교수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회한이 남지 않으며 주변 정리를 잘하고 생을 마감하는 게 아름다운 죽음''이라면서 ''이를 위해 살아있을 때 준비해야 하며 호스피스 확충 등 제도적 뒷받침도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강할 때 미리 준비한다]
건강할 때 죽음을 미리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해 유서를 미리 저장해 두는 인터넷 서비스가 등장했다. 가입자가 사고 등으로 숨지면 유족이나 지인들에게 e-메일과 우편으로 미리 써둔 유언을 배달해 준다. 지난 10월 18일 문을 연 '굿바이 메일(goodbyemail.com)'에는 800여명이 가입했다. 이 중 100여명이 유언을 작성해 놨다. 이 회사 김성대 대표는 ''법적 효력은 없지만 사진과 동영상 등도 담을 수 있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서울YWCA의 '멋쟁이 할머니 반'도 첫 시간에 유서를 미리 써보도록 한다. 프로그램 기획자인 소설가 한정신(62.여)씨는 ''나이가 들면 언제 갑자기 큰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건강할 때 삶을 정리해 보자는 뜻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서울 암사동의 선사 주거지에서 열린 '세계 통과의례 페스티벌 2004'에선 죽음 체험장이 인기를 끌었다. 눈을 가리고 가다 보면 저승사자가 잡아채 관에 눕히고 못을 박는다. 곡소리를 듣다 나오면 ''당신은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며 조그만 나무판에 각자 생각한 묘비명을 적어보도록 한다. 공무원 이상근(42)씨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앞으로 더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주변에 꼭 권하고 싶은 경험''이라고 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회장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 www.kakdang.or.kr)와 '밝은 죽음을 준비하는 포럼'(회장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gooddeath.or.kr)도 ''죽음 준비교육을 통해 품위있는 죽음을 맞도록 하자''며 각종 세미나와 강연회를 열고 있다.
[일본 존엄사협회 사무차장 인터뷰]
일본 존엄사협회 전무이사인 마쓰네 아쓰코(松根敦子.71.여)는 30년 전 시부모가 숨지기 직전까지 의료 기계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것을 보고 남편과 함께 이 협회에 가입했다. 덕분에 7년 전 남편이 말기 인후암으로 숨질 때 집에서 좋아하던 술도 조금씩 마셔가면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는 집 현관에 '의식을 잃어도 절대 소생시키지 마세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걸어두고 있다.
일본 존엄사협회는 회원에게서 의학적으로 불치 상태에 빠졌을 때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받는다. 1976년 창설된 이 단체의 회원은 10만6000여명. 해마다 그 숫자가 늘고 있다. 협회의 시라이 마사오(白井正夫.사진)사무차장은 ''자기 의사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인권의 한 갈래''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회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 노인이다. 의료계 인사가 많다. 정치인도 끼여 있다. 회원이 되면 선언서를 작성하고 연회비 3000엔을 낸다. 회원들은 교통사고 등에 대비해 존엄사 취지가 담긴 회원카드를 항상 갖고 다닌다.''
-선언의 법적 효력은.
''없다. 법안 청원 단계다. 법적 효력은 없더라도 회원에게서 존엄사 의향을 전달받은 의료인은 그 의사를 존중한다.''
-존엄사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일본 후생노동성이 지난해 실시한 의식 조사에 따르면 고통을 동반하는 말기 질환 상태에 빠졌다면 응답자 74%는 단순한 연명치료에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그 가운데 59%는 존엄사를 지지했고 14%는 안락사까지 찬성했다. 존엄사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37%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나.
''통증 완화 치료가 중요하다. 말기 암 등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편안한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마약성 진통제 등을 사용해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 중점을 둔다. 환자와 가족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신적 치료도 병행한다. 호스피스센터는 전국에 138개(2608개 병상)에 이른다. 최근에는 재택 완화 치료를 하는 왕진 의사가 늘고 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2004-12-09 11:4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