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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철 정기학술대회 세션 탐방 4 - 질 들뢰즈, 표현 커뮤니케이션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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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철 정기학술대회 세션 탐방 4


 


 


질 들뢰즈(Glles Deleuze), 표현 커뮤니케이션과 예술


 


박태순 (미디어로드 소장)


 



1. 표현 커뮤니케이션과 재현 커뮤니케이션


 


들뢰즈 미학의 중심 개념은 표현(expression)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표현’ 개념을 본질(substance), 속성(attribut), 양태(mode) 사이의 관계에서 확대 해석하면서 존재론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를 통합하고자 한다(Deleuze, G.,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Les Editions de Minuit, 1968.).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합적 존재 원리와 조건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인 윤리론 속에서 이 세 가지의 관계성을 정리하고 있다(Spinoza, B. L' Ethique, Gallimard/folio essais, 1954.). 예를 들어 본질 혹은 신은 어떤 존재론적 설명(이유, Why)이 요구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설명력을 갖는다. 즉, 신은 외부 타자에 의한 설명 없이 스스로 자기 완결성을 갖고 존재한다. 그럼 이 본질은 어떻게 인지될 수 있는가. 이는 속성에 의해서이다. 속성은 신의 존재 본질을 표현(expression)한다. 즉, 사랑, 자비, 용서, 양선, 분노 등과 같은 신의 속성은 신의 존재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들이다. 양태는 이러한 속성을 가시적으로 나타내고 설명한다. 양태들은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기재들이다. 신의 속성을 유전 받은 인간은 약자에 대해 눈물 흘리고, 정의를 위해 행동하며, 선을 베푼다. 이러한 인간적 행위들은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은 정지되고, 고정된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곧 운동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작업을 끌어와서 재현(representation)과 대립적인 의미에서 표현(expression)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문화와 예술 활동에 있어서 재현(representation)은 재현 대상과 재현된 것이 동일한 것으로 본다. 특히 미디어를 통한 문화적 재현은 문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실재로는 재현 대상과 재현 내용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즉, 재현 대상은 재현되는 동안에 이미 그 본래의 모습에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재현은 대상을 한 시점에서 단순화, 상징화, 고정화한다. 따라서 재현 커뮤니케이션은 대상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지 못하고 오직 정체성(identity)만을 나타낼 뿐이며, 찰나를 포착한 사진일 뿐이다.


 


“나를 재현한 사진은 내 모습의 한 찰라만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므로 재현 커뮤니케이션은 오직 고정된 의미, 하나의 상징적 의미만을 전할 뿐이다. 특히, 신문, 사진 혹은 텔레비전 등의 전통 미디어들은 문화와 예술적 실재들을 재현해오면서 현대인의 인식 세계를 주도해왔다.  


 


들뢰즈는 전통적 문화 양태와 예술 행위의 재현적 경향들을 비판하면서 표현(expression) 개념을 통해 예술 및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양식들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은 사물의 세계 혹은 예술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분출하여 지각되는 것들 즉,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회화를 통해서 신체 각 기관을 그대로 재현하고 각 기관의 고정된 아이덴티티만을 강요하는 ‘그리기’를 거부하고 각 기관들로부터 자극되는 감각과 이를 통한 끊임없는 운동들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에 주목한다. 들뢰즈는 베이컨을 통해서 예술의 재현성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감각을 투영하면서 부유하는 다성성, 다의성을 열고 있는 화가로서 베이컨을 평가한다(Deleuze G., Logique du sens, Les Editions de Minuit, 1969.).



예술 작품은 무언가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들, 운동들을 지각하여 표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정형화된 형식을 해체하고 탈 영토화 하는 것이며, 이것이 예술의 창작활동이다. 예술은 다양한 운동들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관람자와 청중들을 자극(affect)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지각(perception)으로 이끈다. 관람자와 청중은 예술작품을 지각하면서 정서나 분위기와 같이 작품 속에서 포착되는 변화들의 의해 감동을 받는다. 정서나 분위기는 작품 속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동하는 움직임이며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와 운동을 드러내는 것이 표현 커뮤니케이션이다. 



결국 표현(expression) 커뮤니케이션은 재현(representation)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숨겨지고 잊혀져왔을 상황들에게 변화를 활성화시키는 에너지이다. 표현은 정체성과 존재에 대립되는 운동과 생성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이러한 운동과 생성을 표현해야하는 것이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아테네 학당>





1)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이노센트 10세는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용서, 관용과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교황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 괴성을 지르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자유로운 손과 달리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묶여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종교계의 최고 권력자로서 민중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교황이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듯 괴성을 지르는 듯 한 얼굴 묘사는 다분히 공포감을 준다. 얼굴은 마치 빛에 녹여가는 듯 해체되는 ‘아플라(aplat, 압착한 상태)’를 통해 구상미술(figurative)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베이컨의 그림은 관객이 교황이라는 선입관에 잡혀 그림의 의미를 도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원본 그림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식이 선행되기 이전에 감각을 일깨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2) 전통적인 재현 체계를 통한 구상 미술을 전형인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의 많은 철학자들의 모습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할 할 뿐 이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화가의 역할은 있는 것을 그대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불과한 것이다. 들뢰즈에 있어서 기존 통념으로 주어진 것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이런 체계는 감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예술에 대한 이와같은 철학적 관조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이미 존재하는 지배구조, 그리고 틀지어짐을 벗어나고자하는 저항에서 나타난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거대한 지배구조와 억압구조를 벗어나 긍정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써의 자기표현을 해내는 주체가 제시된다. 들뢰즈는 사회적 생산이 이미 결정된 조건 속에 있는 욕구적 생산일 뿐임을 비판한다(Deleuze G.,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Les Editions de Minuit, 1972.).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에서의 예술적 생산도 영토화된 구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억압에 지속적으로 도전 받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재현의 부정과 표현의 대안은 예술을 구속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무한 감각의 세계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예술의 표현 커뮤니케이션적 기능을 발견하고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자화상>




 





베이컨의 작품은 신체의 기관, 신체 구조를 재현하기를 거부하고, 신체 각 부분의 미세한 감각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하고자 하였다. 그의 미술은 특정 기능에 국한된 기관의 아이덴티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근육의 긴장, 힘의 생성, 감각의 유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의미만을 전하는 재연 커뮤니케이션의 거부와 매 순간 순간 변화하는 대상을 설명하는 표현 커뮤니케이션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른바 겉모습이라 함은 오직 한 순간에만 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눈을 깜박이거나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다시 보면 그 겉모습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말은, 겉모습이란 계속적으로 ‘떠다니는 것[부유(浮遊)]’과 같다는 의미이다”(프란시스 베이컨).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 속에서 인간 안에 있는 동물적 감각 기능, 운동성, 변화와 생성의 물리적 양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창작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결국, 들뢰즈에 있어 예술적 표현은 끊임없이 부유하는 운동들, 감각들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과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이며, 표현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다.



연장선에서 들뢰즈에 있어서 문학은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느낌을 주는 일련의 과정들의 표현에 관한 것이다. 들뢰즈는 문학에 대한 정제된 글쓰기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각의 논리>, <천개의 고원> 등 저서 곧곧에서 작가들을 언급하고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문학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affects), 내가 깨닫는 지각(perceptions)과 내가 느끼는 감각들(sens)을 창조하기 위해 언어의 문법적 의미구성을 삭제하고, 지속적으로 언어를 교란하면서 해석을 위해 정형화되고 정립된 기술들을 넘어서 새로운 언어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네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 <나그네>)


 


문학은 문법적 언어체계와 해석구조를 깨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언어형식을 만들면서 의미구조들을 무너뜨리면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다.



들뢰즈의 철학적 일탈은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영화 1 : 운동-이미지> (Deleuze G., Cinéma : l'image-mouvement, Les Edition de Minuit, 1983. )와 <영화2 : 시간-이미지> (Deleuze G., Cinéma : l'image-temps, Les Edition de Minuit, 1985.)는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를 영화와 결합시킨다. 이 두 권의 책은 영화를 통한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지 혹은 영화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 하는 논제를 현대의 지식체계에 던져주고 있다.   


 
2. 표현 커뮤니케이션의 양태 :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베르그송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실재와 관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미지를 제시한다. 베르그송은 영적 삶이 육체적 삶의 결과 일 수 없고, 반대로 육체적 삶이 영적 삶의 결과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에 있어서 이미지는 인간의 육체적 지각와 정신적 사유작용을 연결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Bergson H., L'énergie spirituelle, Quadrige/PUF, 1919). 인간 주체는 ‘지각’이라는 외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미지 작용을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인간 주체 밖에 있는 객관적 세계이며, 이는 곧 물질 세계와 등치된다. 이제 이미지는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은 이미지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은 오직 이미지를 통해서 인간의 감각 기관과 커뮤니케이션하기 때문이다.


 


“나의 실존은 나의 이미지이다.”
   “나의 존재는 타인에 있어서 이미지의 존재이다.”


 


타자는 나를 어떻게, 어떤 도구로 인식할 수 있을까? 타자는 감각 기관을 통해 자극(affect)되어 오는 이미지를 통해 나의 실존을 인식하고, 사유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실존이다.


 


“(들뢰즈는) 우리가 본 세상을 통해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그 이미지를 통해 영화를 만들고 그렇게 구성된 영화를 우리가 다시 보는 과정에서 영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유한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김기현, <들뢰즈의 영화와 미술>).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이 그것을 잡아내지 못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의 오감이 잡아내지 못하는 이미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는 ‘객관적 이미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오감이 자극(affect)을 받아 개별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를 ‘주관적 이미지’이다. 세계, 혹은 우주라는 우리의 지각 능력 밖에 있는 객관성의 체계, 즉 객관적 이미지(우리의 감각이 명확히 지각하지 못하고 단지 카오스적 상태로 있는, 마치 신의 이미지) 속에서는 우리의 몸 또한 다른 많은 이미지들과 마찬가지고 또 하나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언제나 사물이 작용하는 동안(혹은 지속, durée) 사물과 평형적으로 작동한다. 나의 이미지는 내가 존재하는 동안 평형적으로 타자에게 작용한다. 그리고 내가 떠났을 때 남는 것은 이미지의 흔적, 즉표상이 남게 된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의 나에 대한 표상(재현, representation)만이 나를 보여준다. 표상은 나를 표현하는 많은 이미들 가운데 나의 흔적을 드러내주는 고정된 몇몇의 상들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부단한 변화 그리고 운동(movement)과 관계를 맺게 되며, 공간으로 각인된다.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 운동의 법칙을 활용한 예술 활동이다. 베르그송은 영화가 움직임이 첨가된 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 움직임의 조각들을 우리에게 준다는 점을 직시한다(Bergson H., Matière et mémoire, Quadrige/PUF, 1896.)



. 영화는 인간의 감각이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을 카메라를 통해 지각하여 객관적 이미지들을 끄집어내고 이를 선택(편집)하여 다양한 운동을 카메라의 눈으로 재구성하여 주관적 이미지를 만든다. 영상은 이미지라 부르는 스냅 조각들(사진들)과 이 이미지들을 미세하고 추상적이며 균일하게 전개시키는 장치들에 의해서 조작됨으로써 비인격적 시간과 움직임에 의해서 구성된다(Deleuze G., Cinéma : l'image-mouvement, Les Edition de Minuit, 1983, p.10.). 이러한 영화 방식은 영화의 이미지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의 가상적 재현(표상)을 넘어서 새로운 현실을 표현(expression)해 낼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영화의 이미지는 사물의 실체, 정체성 대한 재현(표상)이 아니라 부단한 운동의 표현이다. 카메라는 인간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 훨씬 자유로운 지각의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태생적으로 정해진 한계와 시선의 경계를 넘어서 초미세 혹은 초 광범위한 시각적 지각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점 변경의 수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영화가 움직임이 첨가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 즉 움직임의 조각들(coupe mobile)을 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운동-이미지는 액션에 우선권을 주며, 따라서 운동에 우선권을 준다. 주먹질, 키스와 눈꺼풀의 움직임 등, 액션-상황-액션으로 이어지는 운동-이미지는 전통적 영화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에이젠스타인(Sergei M. Eisenstein)은 모든 필름에서 몽타주를 강조했다. 당시 유행했던 몽타주 기법은 모든 시간과 존재 기간(durée)을 뒤집는다. 몽타주는 모든 시간의 이미지와 관련된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운동-이미지만을 작동한다. 몽타주는 모든 시간의 순서를 전복시키고 시간적 이미지, 즉 이미지의 시간성을 말소시키며 오직 운동-이미지들을 조합하고 배열한다.


 


누벨바그의 출현은 이러한 운동-이미지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이제 영화는 공간을 구성하는 운동과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들뢰즈는 바쟁(Bazin)이 ‘이미지-사실(l'image-fait)’라고 부르는 새로운 이미지 행태를 발명하였다고 평가한다. 바쟁은 분산되고, 생략되며, 부유하고 흔들리는 것들, 가정된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형식들에 대한 기준의 필요성을 상기시켰다. 그에 있어서 실재는 더 이상 재현되거나 재생산되는 것이 하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미지와 기호의 편집이 이제 운동-이미지 조각들의 일시적 정지, 자리기, 연결하기를 넘어서 영화가 새로운 의미론의 창출해내는 가능한 조건들을 구성하고 있음을 관찰한다(Deleuze G., Cinéma : l'image-temps, Les Edition de Minuit, 1985, pp.13-39.).  들뢰즈는 영화가 이미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면서 내러티브를 나타내고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미지의 시간화 작업은 인물과 사물들이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위치에 구속되지 않고 탈영토화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는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직 지각 기능만을 의존해 시간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누벨바그의 대표적 영화,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Alain Resnais), 마르게리트 뒤라스의 시나리오에 의한 〈히로시마 내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 이 영화에서 일본인 남자와 프랑스 여인의 사랑에서 이미지들은 그들의 과거로부터 지배당하고, 현재에 잠식당하며, 미래의 불안을 예측하도록 관객들을 매혹한다. 그리고  영화가 진전됨에 따라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고 나아가서는 미래까지 추측하라고 요구받는다.



<천국보다 낮선, 1984> - 짐 자무시 감독




 


헐리우드 영화와 다른 이민자에게 영원히 낮선 미국 땅.
방랑하는 로드무비 또는 끝없는 여행의 이미지가 풍경을 통한 방랑에 의해 이웃하는 운동-이미지에 연결될 지라도 방랑의 행위는 그 자체 목적이 없다. 이 영화는 배우의 움직임, 운동에 관한 것 이라기보다는 풍경을 지각하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시간은 모든 상상력을 응축한다. 영화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응축하여 짧은 플롯으로 표현한다. 이 플롯은 시간의 현재성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의 움직임, 심리적 변화의 흐름을 표출한다. 플롯은 영화의 사건의 질서와 의미를 결정짓는 변화무쌍한 힘으로 모든 시간을 현재 속에 응축하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현실(실재)로써 이미지를 제공한다. 영화의 시간-이미지는 ‘현재’의 지배성에 기반 한다. 인간은 가장 가까운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자극(affect)을 받고, 지각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언제나 현재를 흐르며, 과거와 미래를 소환한다.



들뢰즈를 통해 사유하는 매체 미학, 그것은 끝없는 움직임이며 창조이다. 정지되고 고정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권력과 사유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본주의적 속박과 동화를 벗어나 새로운 표현의 도구들을 만들어내고 나를 확장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지배체계와 구조에 속박된 주체가 아니라 부유하는 창조된 창조자(creator created)로서의 존재 그 자체는 표현하는 존재, 표현 커뮤니케이션의 주체이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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