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가을철 정기학술대회 세션 탐방 3
제작자 엑서더스와 새로운 약속의 땅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강사)

1. 엑서더스(Exodus)
<응답하라 1994>, <꽃보다 할배>, <히든싱어>, <썰전>, <먹거리 X파일>… 이들의 공통점은 비지상파 채널을 통해 편성되어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프로그램이며, 지상파에서 종편 등의 PP로 이적한 유명 예능 피디 혹은 작가들이 주도한 제작물이라는 데 있다. 지상파에서 만들어지거나 편성된 프로그램이 텔레비전 콘텐츠 시장을 압도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양식의 프로그램이 국내 콘텐츠 시장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증대시키고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가 기존 지상파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억제한 조건에서 발생한 일종의 반사작용이거나 부산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부정적 배경과 결과에 대해 비판적인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현재와 같은 비지상파 제작물의 등장과 성공은 최근 벌어진 제작자 엑서더스, 즉 지상파 제작 부문으로부터의 인력 대탈출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판단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문화적이고 정치경제적인 함의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제작-편성의 단단한 수직결합과 콘텐츠 공급 차원의 독과점적 시장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시스템에서 수직결합의 해체와 경쟁적 시장구조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상은, 비록 완전히 보편적인 흐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수 국가의 방송영상 시장에서 비교적 뚜렷한 경향성을 띠고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고용구조 측면에서 상당히 안정적이고 시장으로부터 가해지는 직접적인 압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종의 엘리트 제작 집단에 속해 있던 제작 인력이, 기존의 안정적 구조에서 벗어나 시장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성과 위주의 체계로의 대규모 이동을 감행하는 현상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가장 비근한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정부의 독립제작 활성화 정책에 따라 지상파 자체제작 부문에 의한 콘텐츠 공급 독과점이 해체되고 대규모 독립제작사의 성장이 이뤄졌던 영국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서서히 시작되어 2000년대 들어 완연해진 인력이동, 즉 공공서비스 지향의 지상파 자체제작단위에서 성장한 엘리트-작가주의적 제작인력이 이른바 ‘슈퍼 인디’의 시장 대중주의적 시스템으로 이동해간 과정과 그 결과는 국내에서 발생되고 있는 최근의 ‘제작자 이주’ 현상을 비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들의 이동은 단순히 높은 경제적 보상을 기대해서만이 아니라 좀 더 창의적인 표현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기존 엘리트주의를 해체한 결과가 제작인력들 사이의 상업적 위계화와 분극화로 변형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 등이 이 연구가 주목하는 특징들 가운데 일부이다.
2. 평행구조(parallel action)
# 장면1 - 종편 등장과 함께 형성된 제작자 'FA 시장'의 동학
2009년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거쳐 미디어 관련법이 통과된 이후 신문과 방송 사이의 겸영이 부분적으로 허용됐고 2010년에 이르러 신규 보도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의 승인이 떨어졌다. 2010년 12월31일 방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MBN에게 신규 채널 승인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들 채널이 2011년 12월 1일에 일제히 방송을 개시하기 전까지의 약 1년의 기간 동안, 그리고 실은 그 뒤에도 한참 동안, 한국 방송 부문은 아마도 국내 방송사의 한 페이지를 드라마틱하게 장식하게 되리라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쳤다. <시사IN>의 고재열 기자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고재열 2011).
방송가가 술렁인다. PD들의 이적 열풍 때문이다. MBC에서 여운혁·임정아·성치경 PD가 종합편성채널로 옮기기 위해 사의를 표명했다. KBS에서도 김석윤, 김시규, 김석현, 조승욱 PD 등이 역시 같은 이유로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 방송사 모두 간판급 예능 PD들이 종편행을 선택하면서 예능국이 동요하고 있다. 강호동의 천생연분> <황금어장-무릎팍도사> 등을 기획·연출한 여운혁 PD, <황금어장-무릎팍도사>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1> <위대한 탄생> 등을 연출한 임정아 PD, <느낌표> <쇼바이벌> <스친소> <일밤-단비> <추억이 빛나는 밤에> 등을 연출한 성치경 PD는 모두 능력을 인정받은 예능 PD이다. 이들은 MBC 출신 주철환 교수가 방송제작본부장으로 재직하는 jTBC행이 대부분 결정되었다.는 이동 규모가 더 크다. <개그콘서트>를 연출했던 김석현 PD가 CJ E&M으로 스카우트된 것을 시작으로, <해피선데이-1박2일>의 초기 연출자이자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까지 총괄했던 이명한 PD 역시 CJ E&M으로 간다.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연출한 김석윤 PD, <해피선데이-1박2일>을 초기에 기획했던 김시규 PD 등은 jTBC로 이적한다. 이들의 '몸값'은 대체로 10억원 안팎인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가 끝난 직후의 치열한 스토브리그를 연상시키듯 “PD들의 이적 열풍”이라 이름 붙여진 이 이상 열풍에 실상 모든 종류의 피디들이 수혜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초점은 예능 장르에 있었고, 프로그램 명칭 뿐 아니라 이름을 직접 내걸어도 대중들의 귀에 낯설지 않을 만큼 인지도가 높은, 지상파 자체제작 부문의 스타급 예능 피디들이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적 시장의 주요 구매자는 스타급 ‘선수’들이 목마른 삼성 라이온즈급 새로운 ‘구단주’로 등장한 jTBC였고, 때마침 대대적인 콘텐츠 투자 의지를 밝힌 CJ E&M이 모처럼 찾아온 이적 시장에 풀린 대어급 FA 선수들의 몸값을 상승시키고 있던 차였다.
신생 방송사들이 스타 PD 영입에 목을 매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을 데려오면 조연출이나 작가 등 제작 스태프가 딸려오고, 연예인 섭외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 졸지에 종편 채널의 ‘인력 공급소’로 전락한 지상파 방송사들은 대규모 경력자 공채를 통해 빈자리를 메워야 할 판이다. 군소 방송사 등에서 일하는 PD들이 몰리면서 대규모 인력 이동이 예상된다. 현재 예능 PD 스카우트는 <중앙일보> 종편인 jTBS와 케이블TV 최대 콘텐츠 제작사인 CJ E&M이 주도하고 있다. 두 방송사가 몇몇 PD를 놓고 영입 경쟁을 벌이면서 PD들의 몸값이 단기간에 급상승했다고 한다. […] MBC의 한 PD는 “예능 PD 중에서 CJ E&M 이미경 부회장에게 식사 초대를 안 받아본 PD는 무능한 PD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케이블업계의 한 관계자는 “jTBC의 경우 100억 규모의 예산을 PD 스카우트 비용으로 책정해둔 것으로 안다. 일부 PD 중에서는 jTBC와 CJ E&M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몸값을 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종편 스카우트 전쟁에서는 <중앙일보> jTBC가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방송가는 본다.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2007년 KBS에서 코엔미디어로 8억원을 받고 옮겼던 이훈희 PD를 jTBC가 영입하면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MBC와 KBS에서 유능한 PD를 빼왔기 때문에 jTBC는 지상파 3사나 CJ E&M 계열에 버금가는 예능 PD 라인업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CJ E&M의 적극적인 공세도 눈에 뛴다. 애초에 조·중·동 종편들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PD들을 빼앗기는 수세적 입장일 줄 알았던 CJ E&M은 오히려 공격적으로 스카우트에 나섰다. 한 CJ E&M 계열사 PD는 “어차피 조·중·동 종편 중 한두 곳은 망할 것이다. 그곳을 인수할 수 있는 곳은 CJ E&M뿐이다. 지금 이적했다가 그때 ‘부역 방송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어서 쉽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방송 시장에 이와 같은 규모의 이적 열풍이 불었던 적이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고찬수 2011). 1991년에 지역민방이 도입되면서 기존 지상파 방송사들의 제작자가 일부 SBS로 옮겨 갔으며, 1995년에 종합유선방송이 시작되자 현대방송 등과 같이 의욕적인 제작 의지를 밝혔던 PP 채널에 다양한 경력직 제작자들의 이동이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직’이라는 것 자체가 기성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컸고, 지금처럼 이적 당사자들의 높은 몸값을 운운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2011년의 이적 시장에도 물론,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처럼, 특히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일부 종편으로 몸을 옮기는 이들을 두고 이른바 ‘부역 방송인’으로 낙인을 찍으려는 시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부러움이 섞여 있기도 했다. 당시 방송가에서는 종편의 사장이나 임원이 초대하는 식사 자리에 부름을 받지 못한 피디는 능력 없는 피디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떠다니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장윤택 전 KBS 편성·제작본부장을 전무로, 김현준 KBS 전 드라마제작국장을 콘텐츠본부장으로, 윤석암 전 CJ미디어 방송본부장을 편성실장으로 영입한 CSTV는 KBS 쪽 영입이 여의치 않자, CJ E&M 계열의 케이블TV PD들을 접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송계에서는 <조선일보> CSTV의 스카우트 실적이 부진한 것을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아일보> 채널A의 경우 자금력이 부족해 본격 스카우트 전쟁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으로 다른 종편사들은 추측한다. <동아일보>는 안국정 전 SBS 부회장을 방송설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영입하고, 박희설 전 SBS아카데미 원장을 방송사업추진단 기획본부장으로 데려와 SBS 쪽 PD 영입에 공을 들였는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스카우트 전쟁에서 SBS는 비켜서 있다. CJ E&M과 jTBC의 스카우트 대상도 주로 KBS·MBC 사람들이다. 두 방송사가 공영인 데 비해 SBS는 민영이기 때문이다. SBS가 옮기려는 PD들을 승진과 연수 같은 ‘당근’으로 붙드는 식으로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반해, KBS와 MBC는 그렇지 못한 구조이다. 주로 KBS와 MBC 출신이 종편 본부장급 간부로 가 있는 것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인다.
특이한 점은 이적 시장에서 이른바 ‘대어급’으로 풀린 소위 FA 제작자들이 주로 KBS와 MBC에 몰려 있고 SBS는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종편 개국 직전인 2011년 11월에 SBS로부터 탈출한 젊은 예능 피디들이 있었고 그 뒤로도 SBS 역시 완전한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SBS가 KBS나 MBC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에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민영방송 SBS는 주요 제작 인력에 대한 스카우트 손길을 막을 여러 가지 인센티브 장치를 갖고 있었지만, 공영방송 KBS나 MBC에게는 치솟은 몸값과 승진 기회를 찾아 떠나가는 피디들을 막고 나설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재정적인 보상과 승진 등이 불가능한 공영방송 특유의 관료적 구조 외곽에도 있었다. 이들 방송사의 제작자들이, 공정방송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의 일각을 구성했던 인물들인 경우도 있었거니와,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과 자율 의지만큼이나 (과거와 달리)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진 제작자들이 경영진의 고루하고 억압적인 분위기와 충돌을 빚고 있었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양사 노조는 이보다 더 큰 이유로 ‘경영진의 무개념과 무관심·무신경’을 꼬집는다. 인재를 붙들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 KBS 새 노조는 “회사 경영진 누구도 KBS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다. 조직의 경쟁력을 키울 의지조차 없다. 능력 있는 구성원의 중요성도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MBC 노조의 한 관계자는 “최근 <나는 가수다>의 김영희 PD를 하차시킨 영향도 크다. 공정 사회를 위해서 자른다는 회사를 보면서 PD들이 할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양사 노조는 또 이번에 이직하는 PD들이 노조 파업 때 프로그램 제작 중단을 주도했던 점을 지적하며, 이들이 회사 간부들에게 지속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MBC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 옮기게 된 PD가 하소연하는 말이, 회사에 남으려 마음을 다잡고 출근해도 국장 태도를 보면 오만 정이 떨어진다더라. 차기, 차차기 국장도 그런 인물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재철 사장의 잘못된 인사가 원죄다”라고 말했다.
이런 측면은 2011년을 기점으로 발생한 대규모의 ‘제작자 탈주 현상’이 비단 금전적 보상과 직업적 기회를 매개로만 일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물론 다른 이들의 시기어린 시선을 떨치려는 목적에서 이들이 나름의 변명 거리를 찾고 적당한 알리바이를 설정해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지상파 방송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탈출’하여, 따지고 보면 “일개 PP 채널”에 불과한, 엄청난 생존 경쟁이 도사리고 있는 혹독한 ‘황야’로 나아가도록 이끈 동인이 단순히 ‘돈’과 ‘승진’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을 낳는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진행한 파업이 아니라 공정성이나 제작 자율성과 같은 다분히 이념적이고 직업적인 가치를 걸고 시작했던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돌아온 결과는, 해당 방송사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제작 인력에게조차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던 경영진의 압박과 제작 기회 박탈이었음을 부인하긴 어려운 탓이다.
방송계에서는 조만간 2차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 방송사 PD는 “지금 스카우트 전쟁은 일종의 예고편이다. 조만간 PD들의 2차 엑소더스가 있을 것이다. 선발대로 간 PD들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갈 PD들이 많다. 지상파 방송은 규제가 많아서 예능 프로그램 제작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찾아서 종편행을 택할 PD가 많다”고 말했다.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이유, 즉 “지상파 방송은 규제가 많아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나름의 진단에는 현재의 제작자 이주 현상을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측면들이 잘 함축되어 있다. 지상파로부터 종편이나 케이블 PP 채널로 탈출한 이들의 동기를 유발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제작 환경”에 대한 욕구이며 현재의 지상파에는 ‘규제’로 통칭되는 다양한 제약 요인, 요컨대 지상파에게 가해지는 비대칭적인 형태의 내용적 억압 혹은 내적이거나 외적인 형태의 검열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대규모 이주를 이끈 ‘큰손’들은 모든 종편이나 거대 미디어기업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콘텐츠에 과감한 투자를 하겠다고 결심한 jTBC와 CJ E&M이었는데, 이들은 그만큼의 경제적 보상은 물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작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유발했다. 위에서 언급된 이른바 ‘2차 엑소더스’의 한 축을 구성했던 나영석 피디가 KBS의 <1박2일>을 떠나 CJ E&M의 <꽃보다 할배>를 만들게 한 배경을 읽게 하는 다음의 인터뷰 기사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흥미롭다(엄지혜 2012).
KBS 파업이 한창일 때, 나영석 PD는 <1박2일>을 함께 만들었던, 최근 <응답하라 1997>를 히트시킨 이우정 작가를 오랜만에 만났다. 예능작가로 잘 나가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드라마를 쓴다고 푹 빠져있는 걸 보고, 그는 “대체 언제 철이 들려고 이러니.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실패하면 큰일 난다. 화려한 경력에 오점을 남긴다”며 진지하게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실로 심플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공, 실패 따져가며 일했어? 재밌을 거 같고 꽂히면 하는 거지. 망하면 망하는 거지 뭐.” 나영석 PD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오래된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대답에는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었어요. 저도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에요. ‘일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명령하는 것이다. 성공을 좇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그동안 잊고 살았던 거죠. 나름 <1박2일>을 통해 유명해지고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는 생각에 다음 작품에 대한 걱정, 가슴으로 두근거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재단하려 들었던 거예요. 문득 저를 둘러싸던 고민의 실체가 뭔지 알게 됐죠.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 사람들이 없었으면 절대로 안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장면 2 - BBC로부터의 인재유출과 ‘막강인디(super-indies)’의 성장
텔레비전 프로그램 독립제작 시장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 편인 영국에서는 이른바 일인밴드(one-man band)라고 불리는 수공업적 소규모 제작사에서부터 ‘작은 할리우드’라고까지 지칭되는 거대기업화된 막강인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제작사들이 존재한다. 소위 막강인디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일부 수익성 높은 영국 독립제작사들에 대한 금융권의 투자가 가속화되면서 거대 독립제작사들 사이의 인수합병전이 치열하게 불붙은 2005년 시점의 일이다.
상반기부터 시작된 BBC 핵심 인력의 이탈은 BBC3 채널본부장이 독립제작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고위직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영국 방송시장은 주요 인력들의 방송사간 자리 이동이 한국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조건인지라, 시장이 원하는 인력이 더 나은 보수와 더 큰 권한을 좇아 독립제작사로 자리를 옮기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은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것이 일상적인 자리 이동에 국한된다기보다는 BBC의 구조적 변화, 나아가 영국 방송 산업 전반의 거대 변동을 함의하는 심상찮은 일련의 징후라고 볼만도 했다. 특히 BBC가 경영효율화를 내걸고 진행해왔던 구조조정이 ‘잉여인력의 감축(redundancy)’이 아니라 핵심 인재의 유출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시각이 제기됐다.
실제로 마크 톰슨(Mark Thompson) 사장은 칙허장 갱신을 보장받을 목적에서 정부와 약속했던 자구노력(self-help)의 일환으로 (전에는 여간해선 손을 대지 않았던 기자 인력이나 제작 인력을 포함한) 추가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던 참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점에 BBC 내에서는 ‘인재유출(talent drain)’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5년 상반기에 BBC를 떠나 다른 방송사나 독립제작사로 자리를 옮긴 고위직 인사만 해도 열 명이 넘었을 뿐 아니라 이런 현상이 더 확대되고 가속화되는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대표 채널 BBC1 본부장이었던 로레인 헤거시(Lorraine Heggessey)가 거대 미디어 기업 RTL 그룹 계열의 제작사인 토크백 템즈(Talkback Thames)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예능편성국장 앨런 브라운(Alan Brown), 스포츠국장 피터 샐먼(Peter Slamon), 아동드라마국장 엘린 스퍼버(Elaine Sperber), 예능국장 제인 러쉬(Jane Lush), 그리고 앞서 언급한 청장년 채널 BBC3 본부장 스튜어트 머피(Stuart Murphy) 등이 썰물처럼 BBC를 빠져나갔다(Broadcast 2005b).
이들의 유출은 BBC 경영을 담당하는 핵심 인력의 손실이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이들을 쫓아 추가적인 인재 유출이 발생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BBC의 걱정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능력 있는 프로그램 제작자들에 대한 선구안과 판단 능력이 입증된 인물들로서, 이들이 외부로 이끌어서건 당사자들이 스스로 같은 길을 선택해서건, BBC의 중간 경영자들이나 자체제작 부문의 핵심 인재들이 BBC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리는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능국장 제인 러쉬가 독립제작사 스플래쉬(Splash)를 만들어 나간 것은 BBC1 채널본부장이었다가 독립제작사 텔레비전 코퍼레이션(Televsion Corporation) 사장이 되어 BBC를 떠났던 피터 샐먼(Peter Salmon) 영향이었고, 이것은 다시 제인 러쉬 휘하의 예능국 소속 인재인 페니아 바더니스(Fenia Vardanis)도 스플래쉬 행을 선택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피터 샐먼의 후임으로 최초의 여성 BBC1 채널본부장을 맡았던 로레인 헤거시는 토크백 템즈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트라우마(Trauma) 등의 인기 프로그램을 만든 능력있는 제작자 카밀라 루이스(Camilla Lewis)를 빼나가기도 했다. 핵심 인력의 유출이 다른 핵심 인력의 추가 유출을 촉진하는 방송가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 구조를 선명하게 확인하게 한다.
당시 톰슨 사장의 제작 인력 구조조정 계획과 창의적 경쟁의 창(WoCC: Winodw of Creative Competition 기존 외주제작 쿼터 25% 외에도, 추구 25%를 자체제작과 외주제작 사이의 창의적 경쟁에 붙이는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자체제작 부문의 규모와 안정성이 상당히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이 아마도 큰 배경요인이 되었을 테다. BBC 조직의 강점은, 비록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낳긴 했어도,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인재들의 엘리트주의적 자부심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독특한 종류의 창의성을 보장한다는 데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단순히 금전적인 보상 이상의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보상이 중요했다. 그러나 BBC가 더 이상 예전의 그런 장점을 제공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하자, 차라리 이 기회에 (자발적 퇴직에 대한 보상금도 챙기면서) 더 큰 연봉과 더 넓은 기회를 약속하는 독립제작사로 탈출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기대가 형성될만했다. 말하자면 ‘굳이 자르기 전에 알아서 먼저 나가달라’며 슬쩍 열어두었던 문으로, ‘부디 그 자리에 머물러 줄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대탈주를 시작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 인력을 잃는 것이 실제로 BBC에게 큰 타격을 줄만큼 중요한 일이었을까? 2005년 당시로부터 201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관찰해 보면 당시의 인재 유출로 인해 BBC가 대단히 허약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창의적 조직’을 규정하던 중요한 요인들이 상당 부분 사라졌고, 그것은 BBC 조직 일반에 구조적 자취를 남긴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당시 BBC는 자리를 떠난 핵심 인물을 대체할 인물을 찾지 못해 상당 기간 작업상의 공백을 경험하기도 했다. 코미디편성국장 마크 프리랜드(Mark Freeland)가 독립제작사 하츠우드 필름스(Hartswood Films: 국내에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걸작 드라마 <셜록> 시리즈를 탄생시킴)로 이적한 후 반년 동안이나 후임자를 구하지 못했던 상황이 대표적이다(Broadcast 2005c).
물론 이런 지적에 대해 “다분히 과장된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두뇌 유출(brain drain)”로부터 유추해낸 “인재 유출”이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불안을 조장하는 일종의 여론조작술이라는 것이다. BBC 코미디 관련부서에서 일하는 한 부장급 인사가 “인재 유출을 경고하는 주장은 기존 인력이 빠진 자리를 새로운 인력이 잘 메우고 있음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한 경우가 그렇다(Broadcast 2005d). 이런 관점에 의하면, 중량급 인사들이 돈과 편의를 좇아 BBC를 벗어난 자리에는 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훌륭히 그 자리를 대신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기간 공영방송 BBC에게 기대되는 역할 가운데에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성장시킴으로써 방송산업과 창의산업 전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있다. 다른 데에서 잘 성장한 인력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만 하고 좋은 인물을 내놓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된 바처럼, 모든 담론은 특정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다른 측면은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닌다. 그런 측면에서는 하늘이 당장이라고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과장된 위기론도 문제지만, 세상은 언제나 전과 같을 것이라고 보는 막연한 현실 긍정론적 태도도 문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2005년 이후의 인력 유출 파동을 겪고서도, BBC는 여전히 영국 방송 산업의 중심으로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정말 ‘연어(salmon)’처럼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BBC 제작본부의 최고제작책임자(CCO)를 거쳐 BBC 북부지사(North) 사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피터 샐먼처럼, 유출된 인력의 귀환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니다. BBC에 몸 담고자 하는 역량 있는 인력은 여전히 길게 줄을 서 있다. 과거의 BBC를 묶어주던 ‘엘리트주의적 창의성’은, 공공기구에 대한 효율성 요구의 형태를 띤 파상적 외부 공격과, 공공기구가 육성해낸 스타급 인력만을 선별하여 막대한 보상을 미끼로 빼가는 거대 미디어 기업의 공세 앞에서 상당히 흐물흐물해져 있는 상태이다. 극심한 매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BBC 역시 능력 있는 인재를 붙잡아두기 위한 인센티브를 적절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강인디에 비견될 만큼의 금전적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뿐더러, ‘돈은 적게 주고, 직업적 안정성도 전과 같지는 않지만, 일은 배로 하라’는 요구로 축약될 수 있는 최근의 공공기구 효율화 경향을 생각하면, 과연 어떤 종류의 인센티브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교차비교
2011년 시점에 발생한 국내 지상파 방송사로부터의 제작자 대탈주 현상과 2005년 시점에 두드러진 영국 BBC로부터의 인력유출 현상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포착된다.
- 첫째, 방송 환경의 변화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미디어 거대 기업이 콘텐츠 제작에 관련된 투자를 대폭 키움으로써 시작됐다.
- 둘째, 기존 지상파 방송사와는 차별화되는 재정적 보상 구조를 갖춘 거대 미디어 기업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지상파 엘리트 인력에 대한 시장 가격이 급격히 상승했다.
- 셋째, 기존 지상파 방송사는 이들의 인력유출을 막을 효과적인 장치가 부재했다.
- 넷째, 기존 지상파 방송사의 보상 구조가 상대적으로 경직되어 있음이 명시적으로 확인되는 한편 엘리트 인력의 고용조건이나 작업여건을 불안하게 하는 위협 요인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 다섯째, 거대 미디어 기업에 의한 영입시도는 상업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부분, 즉 장르로는 예능오락 프로그램 부문 그리고 기능으로는 제작 지휘 혹은 프로그램 기획 및 편성에 특화되어 기존 시장에서 검증된 인력에 초점이 두어졌다.
- 여섯째, 기존 지상파 방송사로부터 유출된 인력은 전과는 일정하게 차별화된 콘텐츠를 성공시켜 기성 지배구조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일정한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약속의 땅’을 제시한 국내의 미디어 거대 기업이 여전히 채널사업 위주의 전통적인 방송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영국의 미디어 거대 기업은 프로그램 제작에 특화되어 성장한 독립 프로덕션 기업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국내 미디어 기업은 전통적인 지상파 방송사와 직접 경쟁하는 신규 세력인 반면, 영국의 독립 프로덕션은 지상파 방송사 자체제작 부문과의 경쟁관계가 수립되어 있기는 해도 일대일로 경쟁하는 양상은 아니다. 또한 영국의 독립 프로덕션은 수익성 높은 ‘슈퍼인디’로 성장하면서 사모펀드와 같은 금융자본의 직접적인 개입 대상이 되었지만, 국내의 신규 미디어 기업은 아직까지 금융자본의 지배보다는 자체의 미디어 자본 혹은 특수관계에 있는 산업자본과의 연계가 중요한 측면이 있다.
3. ‘약속의 땅’의 약속은 믿을만한가?
슈퍼인디로의 인력유출과 그와 맞물린 텔레비전 제작 부문의 환경 변화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대별된다. 한 가지 입장은 영국의 슈퍼인디와 이를 매개로 한 독립제작 시장의 성장이 영국으로 하여금 글로벌 시장에서 상당한 주도력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Chalaby 2010). 하지만 또 다른 입장은 슈퍼인디가 주도하는 시장구조는 공공서비스 방송의 약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영국 방송 환경의 노동구조와 작업조건을 전반적으로 저하시키고 제작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날선 비판을 제기한다(Born 2003; Ursell 2003). 어느 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일단 차지하고라도, 영국 방송시장이 기존의 공공서비스 중심의 구조에서 글로벌 판매를 염두에 둔 지역 할리우드(local Hollywood) 형태를 지향해 가고 있다는 지적은 상당 부분 유효해 보인다(Baya 2008).
국내의 경우 역시, 의외로 직접적으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문헌이 적기는 하지만, 종편 등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 기업이 기존 지상파 중심의 콘텐츠 독과점 구조를 해체하고 프로그램 다양성을 증대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 육성될 수 있다는 주장과, 새로운 미디어 거대 기업의 등장은 상업화를 촉진하고 제작자를 시장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방송 환경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미디어공공성포럼 2012).
대체로 시장⋅산업론적 접근은 제작 주체의 다양성과 제작 결과물의 다양성을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디어 정치경제학적 입장은 거대 미디어 기업과 제작자 자율성 혹은 창의성 사이의 관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한 반론 측면에서 보면, 제작 주체가 다양해지는 것이 오히려 특정 장르와 포맷으로의 집중 경향과 시장 경쟁을 격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의심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에 관련된 경험적인 자료 역시 적지 않다. 국내의 경우도 유출된 인력의 대다수가 예능 장르에 국한되어 있고 이들이 새로이 만들어내고 있는 결과물 역시 시장에서의 경쟁에 유리한 오락물 위주의 프로그램이다. 최근 종편 채널과 케이블 채널을 통해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서로 어슷비슷한 종류의 오디션 혹은 토크형 예능 프로그램을 보아도 그렇다. 반대로 후자에 대한 반론 측면에서 보면, 비록 국내외의 특정 조건에만 제한된 것일 수 있으나, 현재의 제작자 이동이 단순히 시장에서의 보상을 좇아 이뤄진 현상이 아니라 좀 더 중요하게는 기존 지상파 방송사의 내적 압박과 외적 무력화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또한 최소한 지금까지로 보면, 드라마와 예능 장르에서 새로운 포맷과 혁신을 상대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집단은 이들 ‘탈주자’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다른 한편, 제작자 집단, 혹은 흔히 창의적 노동자(creative workers)로 호명되거나 그것을 자처하는 집단의 ‘자유로운 제작 기회’에 대한 관념과 그것을 둘러싼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예컨대 크리스토퍼슨(Christopherson 2008)은 다양한 산업 데이터를 점검하고 관련자 인터뷰를 수행한 결과에 토대를 두어, 특히 미국에서 케이블 네트워크가 등장한 이후의 환경에서, 미디어 제작물과 프로덕션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에 이면에는 때로 극단적인 수준으로까지 저렴한 예산구조에 바탕을 둔 저가 제작구조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이 과정에서 첫째, 핵심 작업자와 주변부 작업자 사이의 분할과 격차가 확대되고 있으며, 둘째, 프리랜스 직업문화의 확산과 함께 사업장 단위의 노동조합의 결합력은 감소되고 있어서 특히 저예산구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력이 확연히 줄어드는 문제가 발견되고, 셋째, 고용주나 피고용자 모두의 입장에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단단한(hard-wired) 인적 네트워크’ 중심의 사회적, 경제적 작업 구조가 자리 잡게 되면서, 성별이나 인종 등의 측면에서 소수자의 접근 기회가 오히려 차단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아직까지는 명확한 트렌드로까지 부각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종편과 케이블 채널의 ‘화려한 성공’에 가린 이면의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제작자들의 엑서더스를 이끈 것은 분명 속박을 떨쳐야 한다는 황야로부터의 외침이었을 수도 있고, 그것이 안온한 노예 상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진정한 해방의 약속이었을 리는 만무해 보이며, 지극히 선택된 소수에게만 제한적으로 흐르는 ‘젖과 꿀’일 것 같다는 의심이 아주 무망한 것만 같지도 않다.
<참고문헌>
고재열 (2011) “예고편에 불과한 PD '엑소더스‘” <시사IN> 2011년 5월10일자.
고찬수 (2011) “특집 - 종편 출범과 언론사 인력 대이동” <신문과 방송> 2011년 11월호.
미디어공공성포럼 엮음 (2012)

